가입 때 정하고, 그대로 10년... 내 연금이 멈춰 선 진짜 이유
현상유지 편향을 만드는 연금 방치... '그대로 두기'보다 중요한 것은 정기적인 점검과 재선택
▶필자 소개

직장에 처음 입사해 퇴직연금 계좌를 만들던 때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금융상품도 잘 모르고 복잡한 선택을 피하고 싶어 일단 기본으로 설정된 상품을 골랐습니다. “나중에 좀 더 알아보고 바꿔야지”라고 생각했지만, 바쁜 회사 생활에 치이다 보니 어느덧 5년, 10년이 훌쩍 흘렀습니다. 오랜만에 연금 계좌를 열어보니 가입할 때 정해둔 투자 상품과 비중이 단 1%도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입니다.
이런 경험은 생각보다 훨씬 흔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신의 소중한 연금 자산을 적극적으로 운용하거나 바꾸지 않는 것일까요?
교수들도 피하지 못한 ‘그대로 두기’
사람들이 한 번 선택한 상태나 행동을 특별한 이유 없이 계속 유지하려는 경향을 경제학에서는 ‘현상유지 편향(Status Quo Bias)’이라고 부릅니다. 이 개념을 체계적으로 입증한 대표적인 연구가 윌리엄 새뮤얼슨(W. Samuelson) 보스턴대학교 교수와 리차드 제크하우저(R. Zeckhauser) 하버드대학교 교수가 공동으로 발표한 1988년 논문입니다.
저자들은 미국 대학 교수와 교직원 등 약 85만 명이 가입한 미국교직원퇴직연금(TIAA-CREF) 데이터를 분석했습니다. 가입자들은 안전자산 성격의 채권 중심 펀드(TIAA)와 위험자산 성격의 주식형 펀드(CREF) 중 원하는 비율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수수료 없이 매년 변경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평균 가입 기간이 12년에 달했음에도 가입자의 72%는 단 한 번도 투자 비중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매년 투자 비중을 변경하는 가입자는 전체의 2.5% 미만에 불과했습니다. 일반인보다 상대적으로 금융 이해도가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교수와 교직원조차 가입 당시 정한 투자 비율(예: 50 대 50)을 수십 년 동안 그대로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연구가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가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이유는 그 선택이 ‘최선’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단지 ‘처음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후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연금을 그대로 방치할까?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 첫째, ‘후회 회피’ 심리입니다. 연금은 자산 규모가 크고 운용 기간이 깁니다. 괜히 상품을 바꿨다가 손실이라도 나면 “가만히나 있을걸” 하는 강한 후회가 남습니다. 반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최소한 ‘잘못된 선택을 한 책임’에서는 벗어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 둘째, 정보 탐색과 분석의 ‘복잡성’입니다. 연금 상품을 바꾸려면 여러 상품의 수익률과 위험도, 수수료 구조를 비교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 들어가는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 즉 선택 비용이 크다 보니 결국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게 됩니다.
✓ 셋째, '익숙함'과 '매너리즘'입니다. 지금까지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면 굳이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인간의 뇌는 에너지 소비를 줄이기 위해 기존 습관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연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하나의 결정이다
현재의 투자 배분이 자신의 목표와 위험 성향에 딱 맞는다면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검토 후 내린 합리적 결정’인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방치한 결과’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이 차이는 수십 년에 걸친 연금 자산 형성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사회초년생인 30대와 은퇴를 불과 몇 년 앞둔 50대의 재무 환경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30대라면 은퇴까지 수십 년이 남아 있어 주식 등 위험자산 비중을 높여 자산을 키울 여지가 큽니다. 반면 은퇴 직전이라면 단기적인 시장 하락에 대비해 안전자산 비중을 늘려야 합니다.
소득과 자산, 결혼, 주택 구입 등 개인의 재무 상태는 계속 변하며 시장 금리와 경제 환경도 끊임없이 바뀝니다. 그런데도 가입 당시 정한 투자 비중을 10년 동안 한 번도 점검하지 않았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 ‘변화된 환경에 맞지 않는 불리한 투자’를 계속하기로 결정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현상유지의 함정’을 극복하는 시스템 활용법
현상유지 편향을 극복한다는 것이 자주 매매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기적으로 '연금 점검의 날'을 정해 매년 한두 번 정도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 현재 내 연금은 어떤 상품에 투자되어 있는가?
✓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의 비중이 내 나이와 투자 기간에 적합한가?
✓ 가입 당시와 비교해 나의 소득이나 재무 목표가 달라졌는가?
점검 결과 "지금 투자 비중이 여전히 적절하다"고 판단했다면 그대로 유지하면 됩니다. 이때의 '유지'는 방치가 아니라 '주체적인 재선택'이 됩니다. 만약 정기적으로 스스로 점검하고 비중을 조정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자신의 의지력에 의존하기 보다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TDF(Target Date Fund)입니다. TDF는 가입자의 은퇴 예상 시점에 맞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위험자산과 안전자산 비중을 알아서 자동으로 조정해주는 상품입니다. 퇴직연금의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방법) 역시 가입자가 별도로 선택하지 않더라도 사전에 설정된 합리적인 포트폴리오로 자산이 운용되도록 돕는 장치입니다.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인가, 방치하고 있는 것인가?
연금은 한 번 가입하고 잊어버리는 단판 승부 상품이 아닙니다. 수십 년에 걸쳐 자산을 쌓고, 굴리고, 인출하는 긴 호흡의 여정입니다.
모든 투자 결정을 자주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잦은 매매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점검한 뒤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아무 생각 없이 내버려 두는 것은 수십 년 뒤 은퇴 자산의 격차로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1988년 새뮤얼슨과 제크하우저의 논문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핵심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의 연금은 지금 스스로 유지하기로 결정한 상태입니까, 아니면 그냥 멈춰 서 있는 상태입니까?”
Samuelson, W., & Zeckhauser, R. (1988). Status quo bias in decision making. Journal of risk and uncertainty, 1(1), 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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