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경제

[나이듦을 읽습니다] 나의 미래, 할머니

『나의 할머니에게』(다산북스, 2020)

홍태준 기자

▶필자 소개

얼마 전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서는데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줌마, 저 벌레 좀 잡아주세요!"

뒤돌아보니 주변엔 나 혼자뿐이었다. 엉겁결에 "꼬마야, 나도 벌레는 무서워~" 하고 말해버렸다가, 도움을 청하는 아이에게 어른이 할 말은 아닌 듯해서 곧 덧붙였다. 바퀴벌레처럼 생겼지만 바퀴벌레가 아니라 산바퀴라고, 생태계에서 분해자 역할을 하는 친구니까 앞으로 보더라도 겁먹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고.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아이가 얼마나 납득했는지는 모르겠다. 바퀴벌레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생태계의 분해자였던 산바퀴처럼, 이름 하나로 뭉뚱그려진 존재 안에는 우리가 들여다보지 않은 다른 얼굴이 있다. 그 아이에게 나는 이름 없는 '아줌마'였다. 아직도 어색한 호칭이지만, 시간이 더 흐르면 어느 날 불시에 '할머니'라고 불리는 날도 오겠지. 그러다 문득 내 할머니를 떠올렸다. 나는 그분을 '할머니'라는 이름으로만 기억해 온 것은 아닐까.

윤성희, 백수린, 강화길, 손보미, 최은미, 손원평. 여섯 여성 작가의 단편을 묶은 앤솔로지 『나의 할머니에게』에는 생생하고 입체적인 할머니들이 등장한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할머니들 같지만 하나하나가 개연성 있는 독립된 여성들이다. 다만 '할머니'라는 이유로 누구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을 뿐이다. 그중 세 편을 소개한다.

 

윤성희, 「어제 꾼 꿈」

주인공 할머니는 남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혼자 산다. 복지회관에서 수영과 찜질을 하고 구연동화 교실에도 다니며 일상을 촘촘히 채워간다. 죽은 지 10년 된 남편의 제사를 더는 지내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로, 아파트를 팔라던 자식들은 연락이 없다. 할머니에게 오랫동안 왕래가 끊겼던 여동생이 손녀를 데리고 찾아온다. 돈에 인색했던 남편이 어려운 처지의 동생 부탁을 거절한 일로 멀어졌던 사이인데, 꿈에 나타난 형부를 보고 마음을 풀기로 한 것이다.

인삼주와 탕수육으로 회포를 푼 다음 날은 동생 손녀의 생일이다. 아이의 소원으로 '마녀 할머니 놀이'가 시작된다. 놀이터에서 주운 장난감 반지, 낙엽, 단추, 손톱 따위를 냄비에 넣고 수프를 끓이며 소원을 비는 놀이다. 아이는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녀석이 코피를 흘리기를, 무지개를 열 번 보기를 빈다. 동생은 오만 원을 냈는데 오천 원이라 우긴 생선가게 여자가 이틀 동안 감기에 걸리기를 빈다. 할머니의 소원은 아들을 따라다니는 꼬마 귀신이 더는 나타나지 않는 것, 그리고 딸이 일주일에 한 번은 전화해 주는 것이다. 소원이 하나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마음이 찡해진다. "비가 오면 손가락을 벌려요. 그 사이로 비가 지나가게"라는 동시를 좋아하는 이 할머니라면, 손주가 생겼을 때 분명 구연동화를 잘 해주는 할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백수린, 「흑설탕 캔디」

일찍 엄마를 여읜 남매를 키워준 할머니를 손녀의 시점에서 바라본 이야기다. 중퇴이긴 해도 대학에 다녔던 할머니는 피아노와 일본어에 능하고, ‘에델바이스’를 영어 가사로 부를 줄 알며, 영양 균형을 따져 도시락을 싸주는 세련된 사람이다. 오랜 남편 간병 끝에 마침내 혼자 사는 삶을 꿈꾸었지만, 아들의 해외 주재로 프랑스 파리까지 따라가게 되면서 고독은 눈처럼 쌓여간다. 그러다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를 계기로 같은 아파트의 브뤼니에 씨와 짧은 로맨스를 시작한다. 그의 집에 드나들며 피아노를 치고,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시고, 볕 좋은 날엔 함께 산책한다. 할머니가 남긴 짧은 일기를 바탕으로 손녀가 상상한 이야기이지만, 난실씨의 갈망을 오래 생각하게 된다.

그녀가 갈망하던 것은 무엇이었나. 뭔가 특별한 것, 고양시켜 주는 것, 그녀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줄 그 무언가. (63쪽)

아들의 주재원 생활이 예상보다 일찍 끝나면서 두 사람은 뜻하지 않은 시점에 헤어지게 된다. 그 이별 뒤에 남은 것은 이런 마음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주는 즐거움,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다 잃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한여름의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던 행복의 찰나들. (70쪽)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퇴화하지 않는다는 것, 노년에게도 달큰한 욕망과 삶에의 의지가 있다는 것. 할머니들에게는 없으리라 짐작해 온, 그러나 세상 모든 할머니에게 당연히 있었을 감정을 이 소설이 일깨운다. 유성처럼 스치고 간 그 찰나의 행복이 난실씨의 여생에 쓸쓸하지 않은 추억으로 남았기를 바란다.

 

손원평, 「아리아드네 정원」

이 소설에는 가까운 미래의 할머니가 나온다. 비혼인 민아는 '아리아드네 정원'이라는 D등급 유닛에 산다. 유닛은 A, B, C, D, F로 등급이 나뉘어 있어서 이름을 듣는 순간 등급부터 떠올리게 된다. 노후 준비를 잘해 최상위 A유닛에서 시작한 민아는 B를 거쳐 D까지 내려왔다. 한때 결혼 시장에서 최상위 등급 회원이었던 그녀는, 기대 수명이 길어지는 만큼 등급 하락을 거듭해 왔다.

늙은 여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 오늘날에 도달했을 뿐이다. (…) 그러니까 지금과 같은 오늘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것이어야 했다. (199쪽)

스무 살 무렵의 민아는 세상의 주인공이 자신들이었고, 내일은 두근거리는 미지였으며, 노년은 떠올려 볼 수조차 없었다. 그녀가 그릴 수 있던 먼 미래는 적당한 소음이 들리는 평화로운 해변, 주름진 손을 다정히 맞잡고 수평선을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현실은 그 그림과 얼마나 멀었을까.

「어제 꾼 꿈」에서는 다정한 슬픔이, 「흑설탕 캔디」에서는 신여성이었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아리아드네 정원」에서는 내가 마주할 미래가 떠올랐다. 이런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면, 정말이지 늙기 싫다!

 

지난 추석 성묘를 다녀오며 할머니 앞에 생전에 매일 한 잔씩 드시던 커피믹스를 함께 올렸다. 우리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빼어난 분이었다. 잣을 돌돌 만 미나리 회무침, 날아갈 듯 곱게 간 북어무침, 아주 곱게 채 썰어 들기름에 볶은 무채, 살아계실 때 배워두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쉬운 각종 한과. 음식을 하시거나 오래된 서책을 읽으시거나 하루에도 몇 번씩 화투점을 치시던 할머니는, 가끔 나와 민화투도 쳐주셨다. 할머니에 대한 추억과 느낌은 이리도 생생한데 할머니가 해주던 음식, 성품 외에 막상 내가 할머니에 대해 아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하셨던 할머니, 세라복 교복을 입은 학창 시절의 할머니. 그 소녀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홍태준 기자askhongp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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